마네와 카코스카
The Fife Player
1866
Oil on canvas
H. 160; W. 97 cm
© RMN-Grand Palais (Musée d'Orsay) / Hervé Lewandowski
The Fifer is a painting from the Realist school of 19th century painting. It was painted by Édouard Manet in 1866. Manet painted in both the Realist and Impressionistic style, and like many innovative artists, was not well-appreciated in his own time. The painting grew in popularity in the 20th century, moving from private collections to the Musee du Jeu de Paume and finally to the Musee d’Orsay, where it is currently displayed.
The 63 inch by 38 inch oil on canvas painting shows a single figure against a stark background. A young boy dressed in a military uniform of red pants, dark jacket with brass buttons, a white sash, and a dark hat with a red cockade, plays a fife (flute). The flute is dark wood with silver fittings, and a brass carrying case for the instrument rests at his right side. The figure is fully illuminated from the front with only a hint of shadow behind him, giving the painting a curious, almost photographic flatness.
Manet was deeply interested in the painting techniques of the Spanish school. In 1865, he traveled to Spain to study the works of Diego Velazquez and other Spanish Renaissance masters. All of his work would show the influence of this study, but none so starkly as The Fifer. Manet dispensed entirely with Renaissance Chiaroscuro for The Fifer, choosing instead to flood his subject with the most direct light and flatten the scene. Dark outlining further flattens the subject, and the pose, taken from French Tarot, adds to the cartoon-like quality of the piece.
The Fifer, while now recognized as one of the first Early Modern pieces, was totally shocking to its contemporary audience. The great art critic Emile Zola defended it in vain as an expression of artistic innovation and freedom. It would take several decades before anyone agreed with Zola’s analysis.
19세기 현대적인 삶의 모습에 접근하려 했던 화가들중의 하나로 시대적 화풍이 사실주의에서 인상파로 전환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그의 초기작인 <풀밭위의 점심식사>와 <올랭피아>
는 엄청난 비난을 불러 일으켰으나 반면에 수많은 젊은 화가들을 주변에 불러모으는 힘이 되었는데, 이들이 후에 인상주의를
창조하였다. 이 그림들은 오늘날 현대미술을 창시한 분수령으로 여겨진다. 그의 화풍의 특색은 단순한 선 처리와 강한 필치, 풍부한
색채감에 있다.
마네의 1866년 작품으로, 파리 오르세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그림의 모델은 마네의 친구인 르조슨 사령관이 데려온, 황제 친위대 곡예단의 페피니에르라는 피리 부는 소년이다.
붉그스름한 회색 배경 앞에 경찰모자를 쓰고 붉은 바지를 입은 작은 키의 소년이 도드라져 보이는 그림이다. 소년은 얼굴을 정면으로 향한 채 피리를 불고 있다. 이 작품은 손과 발 부분을 빼고는 그림자가 전혀 없는 평면적인 묘사로 인물의 실재감을 표출시키고 있는데, 종이를 바른 것처럼 단순한 배경은 실재감을 강조하는 효과를 준다.
마네는 일본의 판화가 우타마로처럼 검은색·붉은색·흰색의 색조로 인물의 실루엣을 처리하고 있다. 이러한 기법은 1865년 마드리드의 프라도미술관을 방문하였을 때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배웠다는 사실이 마네의 편지에서 밝혀졌다.
"인문! 이 그림 앞에서 인문의 시선이 멈추는 데는
이 그림의 회화적 특징보다, 그 해믈린의 마적수 이야기로
인해서가 아닌가요? 쥐들이 떼를 이루어 휩쓸고
다니는 동네에 한 이상한 옷차림의 풍적수가
등장한다던 그 이야기 말이요? 언젠가 Y작가가 내게
그런 이야기를 했었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난 마네의 그 그림보다 코코스카의 '음악의 마력'이 떠오르던데요"
" 아, 그 마적수 이야기요? 내겐 자신도 모르게 편한 사석에선 누구에게나 그런 꿈속의 것 같은 이야기들을 꺼내곤하는 게 버릇이 되어서요. 이를 테면, 50년 동안이 산에서 술에 취해잠든 후 무려 50년만에 깨어난 무위도식자 남편 '립반윙클'이야기나독일의 검은 숲을 여행하던 일행들이 나무를 깍아 만은 나무 처녀가 생명을 얻어 실제의 사람으로 변해 말을 하고 노래를 하고 춤을 추게 되는 이야기 등 등....
이왕 말이 났으니, S 화가도 좋아했다는 헤믈린의 그 마적수 이여기를 떠올려보아요: 피리를 불며 우굴거리는 쥐떼를 유혹하며, 아이들을 춤추게 하는 그 마적수 이야기를!
예 나 지금이나 내게는 그 미적소리가 늘 궁금했었습니다. 그 소리에무슨 마력이 숨겨져 잇었길래 쥐들이 떼를 지어가 그 소리를 따라 강물 속으로 들어가고, 아이들 역시 그 소리에 홀려 춤추며 그 풍적수를 따라 강물 속으로 들어갔을까? "
"인문처럼 나 역시그 전설에 퍽이나 마음을 빼었겻었지요
사 실 전에 제게 이런 적이 있었습니다. 한 밤 창동 어느 골목길 집에서 새어나오는 플릇소리에 끌려 그 집 창밖에서 한 참이나 천 채그 마적수 이야기를 생각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소리는 비제의 카르멘의 간주곡 '아를르의 여인'이었습니다. 그 플릇소리엔 정말 어떤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이 있었든 듯 합니다. 내 귀는 지금도 그 소리를 생각하면 그 때는 정말 내가 홀려들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제게는 그 마적수 이야기를 생각하면 마네의 그림보다 코코스카의 그림이 먼전 연상되요. 그림속의 나팔수의 몸동작하며 ㄱ 소리에 몸이 저절로
움직이는 소년, ㄱ리고 기 그림속의 분위기 등등으로 말입ㄴ다. 물론 그 그림에는 플릇주자 대신 나팔수가 나오지만
코코스카의 그림속에 그 헤믈린의 이야기에 훨씬 더 가까운 분위기를 띠고 있잖아요.
참고로 코코스카의 그림은 아래와 같다:
Location:
Stedelijk Van Abbe Museum, Eindhoven, the Netherlands
오스카르 코코스카는 오스트리아 화가이자 극작가였다. 그는
강한 표현주의적 초상화나 풍경화의 화가로 잘 알려졌었다.
그는 이 그림 '음악의 힘'을 통해 음악소리가 우리에게 주는 영향을 시각화하고있다.
즉 음악은 우리를 현혹시키거나 놀라게할 수 있고, 불쾌감을 줄수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코코스카 이 그림에는 관객과 가까이에서 마주하는
한 인물의 얼굴과 상반신의 몸이 그려져있다.
그 인물은 나팔과 같은 악기를 불고있으며
왼손에는 꽃을 한송이 들고있다.
한편, 그림의 오른 쪽에 그려진 한 인물이 그 악기 소리에 놀란듯 뒷걸음 치며
손을 들어올려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는 모습이 그려져있다.
그 오른쪽 사람의 윗쪽에는, 개 한 마리가 그처럼 화면 위쪽 밖으로 달아나는
모습이 포착되어있다.
등장인물들의 동작은 그 악사의 악기가 가리키는 대로
화면의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대각선으로 비스듬히 향하고 있다.
악기를 부는 인물은 초록색 옷을 입고 있고, 악기소리에 놀라는 인물은
특징적으로 붉은 색이다. 초록과 빨강 이 두 색깔은 이 두 인물의 상호대비적으로
관련시켜주고있는 반면, 더 나아가 얼굴 손 그리고 하의는 노랑색을 띠고있고,
그 한송이 꽃은 보라색이다. 나팔을 부는 그 인물 얼굴은 오랜지색으로
그림의 상단 부분의 불루와 대비적으로 조화를 이루고있다.
오 늘 인문이 창동의 s화가의 아틀리에서 만난 s작가는 드로잉 솜씨가 드물게 뛰어난 화가이다. 인문은 그를 만날 때 늘상 고 변상봉과 비교된다. 변상봉은 소묘솜씨가 사실주의적으로 탁월한 반면, s작가는 ?신표현주의적이다. 소모라면 일반적으로 색보다 선으로 대상의 형태를 표현한 것으로 드로잉이라고도 볼린다. s 작가는 이러한 사전적 의미에서 벗어나는 소묘를 추구한다는 의미이다. 일기의 수단으로 그는 드로잉을 사용한다. 그에게는 드로잉ㅇ 자기성찰의 도구이기도 한 것이다.
내친 김에 인문에 관해서 짧게 말하자면 이렇다. 즉, 그는 속으로 그
림이란, 비평적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화가의 자유로운 몽상이 구현된 물질적 존재라고 여기는 편이다.
그는 음악을 즐기듯, 시를 즐기듯 그렇게 그림을 즐긴다.
그에게 그림이나 조각은 물질이면서 정신이고,
형식이면서 동시에 내용임을 맛본다.
그것들은 개별적이고 국지적이고 독특하지만
동시에 보편적인 증인이기도 하다.
산문작가로서의 인문은 시인의 시선으로 지역작가들의 의 미술을 읽는다.
보들레르처럼가 채색주의자 들라크로아에 대한 감동을 글로 표현했듯이,
시인 릴케가 세잔느에 대한 경외감을 일상의 편지의 글에 나타냈듯이,
시인의 시선으로 지역화가들의 그림 앞에 선다.
시인 릴케는 세잔느의 그림 앞에서
'화가의 푸른 영혼의 불꽃'을 보았습니다.
그의 작품을 통해 캔버스 앞에 앉은 화가의
대상의 본질을 추구하는 순수한 탐미행위의 구현을
느꼈습니다.
시인 보들레르는 드라클로아의 색채화 앞에서
삶의 비극적 요소가 주는 처연한 아름다움에 전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 전율감을 자신의 고유한 단어로
시적 산문의 글을 였었습니다.
보들레르는 1946년의 들라클로아의 그림전을 두고
단순히 그의 그림을 해석하고있는 것이 아니라,
현대미술에 관한 보들레르 자신의 낭만주의적 정의를 내리고있다.
즉, 주제의 선택이나 그것의 전확한 진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느끼느냐 하는 그 방법에 있었다.
인문은 보들레르의 그런 낭만주의적 상상에 공감한다.
이를 테면, 그에게
그림이나 조각은 물질이면서 정신이고,
형식이면서 동시에 내용임을 맛본다.
그것들은 개별적이고 국지적이고 독특하지만
동시에 보편적인 증인이기도 하다.
램브란트의 성화는 성서이야기를 먼저 생각하게되니
성화의 화면상의 이미지와 그 밑에 깔린 내용을
읽으려는 도상학적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오늘 우리들 지역작가5인의 경우,
작가의 심리적 요소를 감안하여 그림 앞에서
선 관찰자는 화가의 심리를 탐색하기보다 그림을 매개로
자신의 자유로운 상상력 상상력을 펼치게 되는 것이다.
이 발표자의 자세도 그런 것이다.
즉, 그림과 관련하여, 먼저 시를 생각합니다.
한편의 시가 흰색의 종이위에 배열된 단어의 묶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모리스 드니가 주장한 대로,
그림도 역시 우선에는 평범한 표혐에 질서있게
배치된 색면으로 보여지게 된 것이다. 그림이 가지는
일차적인 임무는 설명이 아니라 그 표현력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색채를 통해 사고의 자유로움을
충분히 표현해낼 수 있다.
이제 다시 인문과 s작가의 대화를 이어가자.
" 그런데 해믈린이란 영국작가의 그 이야기는 대충 이렇습니다: 한 마을에 쥐들의 수가 갑자기 불어나 떼를 지어 마을을 휩쓸고 몰려다녔다.골목마다 쥐떼가 우굴거렸고, 집집마다 하수구를 통해 집안으로 들아온 쥐들이 득실거렸다. 마을 사람들은 어찌할바를 몰라 아우성이었다.이때 이상한 옷차림의 한 나그네가 나타나 자신에게 돈 1천 길드를 주면 쥐떼를 마을에서 멀리 몰아내주겠다는 제안을 하였다. 뜻밖의 재난에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고있던 마을 장로들은 이 이상한 나그네의 제안에 귀가 솔깃하여 선뜻 그렇게 하겠노라고 약속하였다.피리를 불며 마을밖으로 형하는 나그네의 뒤에는 놀랍게도,무수한 쥐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가 부는 마적소리는 마적소리가 마을밖 강쪽으로 점점 멀어졌고 쥐들의 행렬도 마적소리를 따라 강쪽으로 떼를 이루어 향하였다.그렇게 쥐떼는 마을에서 사라졌다. 한편 마을 사람들은 그 나그네에게 약속한 돈을 주지않았고, 그는 말없이 마을을 떠났다.얼마후 다시 나타난 그 나그네는 지난 번 처럼 마적을 불며 마을 밖 강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마을의 모든 어린아이들이 춤추며 마적을 부는 나그네 뒤를
따르는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 어른들은 그 마적소리에
이상하세도 그들의 팔다이와 혀가 굳어져 움직일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그 사이 아이들은 그 나그네를 따라
행렬을 이루어 마을 밖으로 이어지는 징검다리를 건너
그를 따라 연기처럼 사라졌다, 강쪽에서 마을로 절뚝거리며
울며 되돌아오는 한 어린아이만 남겨 둔 채.
: ㄴ도 마네의 그림은 좋아합니다. 그의 풀밭위의 식사 그림은
너무나도 유명하잖아요. 그 '피리부는 사람' 그림은 그 스타일로
인해서 특히 유명하구요. 그 스타일?
그린데 인문!
대체로 사실주의적 그림은( 인상주의 회화를 포함해서) 회화의 주제를
자연적 대상에 대한 묘사가 회화적 창작의 전제적 요소로 여기는 반면,
표현주의자들은 한 마디로 그림은 작가의 주관적인 예술적 행위의 결과이다.
즉 그들의 그림은 시각적 대상에 대한 충실한 묘사의 차원을 넘어선 것이다
표현주의그림들의 스타일이 거칠고 함부로 그린 듯하여 보편적인 관객을 당황케했었다.
이 그림들은 글자 그대로 켄버스에 아무렇게나 마구잡이로 붓질하여 여러 덩어리의 색들이나
형태가 나타나도록 하였다. 그런 점에서 이 표현주의 화가들에 대한
비평가들은 이들이 캔버스를 페인트와 붓질로 더렵혀 놓았다고 꼬집기도 하였을 정도였다.
기법상의 특징은 강한 붓질과 과감한 원색 처리, 그리고 대상에 대한 고도의 간략화와 추상화이다.
눈에 보이는 색채가 아닌 마음에 느껴지는 색채를 밝고 거침없이 표현했다. 이지적인 큐비즘과는
달리 감정을 중시한다. 표현주의의 한 형태로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야수파화가들이 객관적인 대상이 형태를 재대로
유지하고있는 반면,표현주의자들에게는 대상의 형태는 오로지 색채와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며
컬러를 통해 존재하였다.객관적인 세목들의 존재는 컬러의 사용에 의존하고있으며, 세목들은
대략적인 스케치로 몇가지의 전형적인 특징으로만 남게되는 것이다.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의 주제를 강조하며, 기술적인 측면에서 색채와 구도,
형태와 대상의 조화를 과장하거나 생략하고 있는 그것이 표현주의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