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적 배경
7.
B: 선생님이 밟았던 1980년 중반의 독일 땅은 어떠했나요? 그땐 역사적으로 세계적 격동기 아니었습니다.
고르바초프 체제의 소련이 몰락하고, 이어 베르린 장벽도 무너지고.
A: 그렇습니다. 미소냉전의 종언이 시작되던 시기시대였지요. 난 냉전 구도가 무너지는 뭐랄까요 그 봇물이 터지는 조짐이 보이기 시작할 즈음에 독일 땅에 머물렀지요. 한 3-4일인 것 같은데, 지금으로부터 30년 가까운 지난 날에 혼자 프랑크 푸르트 공항에 내렸고 그리고 당시엔 공산체제의 동독에 둘러 싸인 일종의 섬 지역이었던 서베르린으로 기차로 들어 갔었지요.
그러니 기억속에 남은 것은 프랑크프르트에서 머문 한 팡숑(가정집 같은 소규모 여관)에 대한 기억, 한 6 내지 8시간읙 기차여행, 기차 창밖으로 본 공산체제하의 동독과 동 베르린의 삭막한 풍경, 그리고 서 베르린 도시의 한 버스속에서처했던 순간 유창한 영어로 나를 돕던 한 중년 남자, 등입니다.
난 지금도 정서적으로 독일은내게 매우 모순적인 문화권으로 남아 있습니다. 숲속에 내리는 햇살 같기도 하지만, 다가서고 싶지않는 음습한 골목길 같은 깃이도 합니다. 이를테면, 바흐, 슈베르트, 베토벤, 토마스 만, 니체 같은 음악과 문학은 햇살 내리는 숲길 같아요. 옛날보도 지금은 더욱 더 이 숲길로 나섭니다. 더우기 독일어는 내게는 괘나 낯선 언어가 아니거든요.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내가 만난 독일들은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거의 없어요. 버스속의 그 신사라면 다시 만난다면 근사한 식사라도 대접할 수 있습니다만, 내가 묵었던 팡숑의 주인 부부나, 기차 속에서 만난 젊은 여행객들은 그렇지 않아요. 친하고 싶은 사람들이 아니었으니까요. 독일인에 대해서는 그 후 다른 여행에서 만낱을 때도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미국의 시애틀의 한 호스텔에서 함께 투숙했었던 독일 여성들은 매우 탐욕적이기도 했습니다. 호스텔은 breakhast로 공동 식당에는 빵과 우유 등 기본 식사꺼리가 놓여지는 데 그들은 주변의 투숙객 입장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습니다. 다른 투숙객이 먹어야 할 몫 마저 손에 들고 자신들의 방으로 가는 게 지금 내 기억 속에 남아 잇어요.
또 한 가지 희한 한 일은 내가 포틀란드에서 한 플라멩코 댄서와 만나기 전 독일인 여학생과 룸 세어(roomshare)를 했었는 데 한 작은 아파트 공간에서 난 와전히 을이고 그 젊은 여학생이 갑이었습니다 그녀의 갑질을 고스란히 당했습니다. 그녀가 좀 이쁘기도 하고 그녀의 영어가 내보다 훨씬 더 능숙했기 때문에기도 햇지만. 본질적으로 그 독일 처녀는 계산이 너무 앞서는 쳐녀였습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시점에 내 야후 메일에 그녀의 메일이 들어와 잇었지만 나는 회신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그녀와 친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였습니다.